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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화장실 이야기

화장실과의 전쟁




"다음 이동 장소까지의 약 2시간은 화장실이 없습니다~ 그리고, 시내로 들어가기 때문에 도착한 후에도 식사 시간 전 까지는 마땅히 용변을 볼 만한 곳이 없으니 이번 휴게소에서 반드시 용변을 마치시기 바랍니다. 휴식 시간은 20분 입니다~ "


이번 유럽 여행 중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인솔자의 안내 멘트이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기만 하면 그야말로 화장실과의 전쟁이다.


본래 여행을 하게 되면 생활 리듬이 깨지고 '매일 아침의 쾌변'이라는 중요한 하루 일과를 속 시원히 처리하지 못하게 되는 법인다, 그것도 선진국들을 여행한다는 유럽에서 이런 희안한 일을 경험하게 되다니...


사실, 이전에도 업무상 출장으로 여러나라를 여행하다 보니 다양한 화장실 문화를 접한 경험도 있었고, 우리와 다른 문화로 적잖게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어 하기도 하였다. 이는 각국의 화장실 문화가 그 나라 국민들의 의식 수준과 국민 성장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 중동 출장 때는 색다른 비데가 재미있어 포스팅한 바도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유료화장실. 사용료는 이번 여행 중 가장 비싼 1유로>


天仁이 이번 유럽 여행 중 '화장실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였다.


첫번째는 여행한 여섯 나라의 시내, 관광지 등에는 공공화장실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간혹 있더라도 '유료'였다는 점이다. 그래도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공공화장실이 눈에 많이 띄는 파리 시내의 화장실(우리나라의 한강 주변, 행사장 등지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임시화장실의 형태)도 '유료'였고,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도 1~0.2유로(한화 약 1,300원)을 내야만 했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국경지역의 화장실. DAMEN, HERREN 아래에 누군가와 한글로 남, 여 표시를 번역해 놓았다>


둘째는 나라마다 화장실을 자국어로 표기하다보니 Toilet, Toilette 등 다양하기도 하여 혼동스러웠지만,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 등 독일어권의 나라들은 자국어로만 남, 여 화장실을 표기하여, 독일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 그림이 있더라도 우리나라와는 달리 색깔의 차등이 없어 남, 여 화장실의 구분이 쉽지 않았다.


고교때 잠깐 독일어를 배우기는 했어도 다 잊어버린 天仁도, 급한 상황에서 그림도 없이 독일어로 적힌 화장실 앞에서 곤란을 겪기도 했다. 여행 준비가 부족했던 天仁도 나중에야 알았지만, 남자용은 'HERREN', 여자용은 'DAMEN'이라고 한다. 독일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HERREN에 'HER'가 들어 있으니 여자용?  DAMEN에 'MEN'이 들어 있으니 남자용?의 섣부른 영어식 추정도 할 수 있겠으나, 이러면 변태 취급 받기 쉽상이다.


또, 처음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한 음식점에서 남녀용 모두 같은 빨강색으로 표기된 화장실 앞에 서서, (빨강색의 화장실 표시에 여자화장실 인줄 알고) 남자 화장실이 어디냐고 종업원에게 물어보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다. (그 종업원은 얼마나 우스웠을까? 야~가 멀쩡하게 생기가꼬 화장실 앞에 서서 뭘 찾노? 색맹이가? ㅋㅋ)

참고로, 유럽의 호텔 수도 꼭지에는 찬물, 뜨거운 물의 색깔 구분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찬물은 파랑, 뜨거운 물은 빨강으로 표시하는 동양권과는 다르다. 이 두가지를 놓고 볼 때, '유럽 사람들은 색(?)을 밝히지 않는 국민들'... 天仁의 결론... ㅎㅎ






그러면 도대체, 유럽에서는 왜 이렇게 화장시르이 무료 개방에 인색한 것일까?
그 답은 화장실의 역사에서 어렴풋이 찾을 수 있었다.
한국 화장실 협회와 모 요업회사의 사이트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세계의 화장실역사


세계에서 최초의 기록이나 유물은 이미 기원전 3,000년대부터 1,400년대 사이에 나타나고 있다. 가장 오래된 화장실은 인도의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금의 수세식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물이 흘러 가도록 시설하여 그 위에 배설하게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것과 그 원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였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 있던 바빌로니아의 유적지인 우르 지방에서도 기원전 2,200년의 수세의자식 변기가 발급되었다. 하수관을 통해 분뇨를 수세 용수와 함께 건조한 모래땅으로 스며들게 하는 방법을 써서 강이나 바다를 오염시키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게 했다.

크레타 섬의 크넷소스 궁전 - 지중해 미노아 문화의 중심지에도 기원전 1,700년에 이미 도기(陶器)로 된 변을 받는 접시형 틀과 나무로 만든 변좌가 갖춰진 수세식 변기가 발굴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집트인들은 집에서 대변을 보고 집밖에서 식사를 한다'고 적었다. 실제로 아케나턴이라는 3,000여년 전 도시유적에서는 화장실과 항아리 변기가 발견된 바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요강을 발명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배설물을 위생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한 건 시기적으로 오래되지 않는다.
그 예를 들자면 19세기 중반무렵까지도 유럽 각 도시의 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화장실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을 정도였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거리에서 볼 일 보는 것을 전혀 꺼려하지 않았다. 1843년 '파리 시공보'에서는 '벌건 대낮에도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그다지 희귀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전혀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가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라고 까지 했다.

17세기 초 최초로 출현한 하이힐도 이러한 오물투성이 길거리에서 생겨났다. 귀부인들의 치렁치렁한 드레스 끝자락에 길거리
오물들이 묻지 않도록 나무 등을 다듬어서 만든 신발을 신고 다녔는데, 이게 바로 하이힐의 유래라는 것이다.

하이힐의 굽높이는 거리를 뒤덮은 오물의 높이와 정확하게 비례했다고 하니, 당시의 거리가 배설물 천지였을 거라는 짐작을 가히 할 수 있겠다. 거리의 오물에 골머리를 앓던 유럽은 화장실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1847년 영국 정부는 대하수 시설이 완성되자, 런던 시민들에게 모든 분뇨를 하수 시설에 방류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한 것이다.

그 이후 변기의 개량과 발명은 눈부실 정도였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수세식 변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로마의 유료 화장실


로마제국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장실 문화를 갖추었던 문명국이었다. 각 가정의 화장실은 물론 수세식으로 설치되어 있었으며 로마 시내에만 석조로 된 공중 화장실이 144개 이상이나 있었다고 한다.

번영 일로를 달리던 로마제국은 계속되는 사치로 인하여 결국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로마제국 인구 중 80% 이상이 국가의 부양을 받아 살아가는 인구였다. 위기감을 느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부족한 세원(稅源)을 보충하기 위하여 골머리를 싸매야 했다. 생각다 못한 황제는 로마 전역에 있는 공중 화장실을 모두 유료화시켰다. 이용을 하는 시민들은 이용료를 내야 했고 이용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벌금을 내야 했다. 배설을 하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화장실 이용료로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도 하나 있다.

어느날 황제의 아들이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냄새 나는 화장실 이용료를 세금으로 걷다니 황제답지 않은 처사이십니다."
베시파시아누스 황제는 화장실 세금으로 징수한 금화(金貨)를 아들의 코에 갖다 대며 말했다.
"이 금화에서 냄새가 난단 말이냐?"


화장실이 없는 베르사이유 궁전과 에티켓의 유래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에 호화스런 궁전을 짓고 이를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베르사이유 궁전이 완성되어 루이14세가 이 궁전으로 옮겨 살게된 것은 1682년의 일이었다.

루이 14세는 각 지방의 영주들을 불러 이 궁전 안에서 살게 하였으므로 당시 이 궁전에는 약 천 명의 궁신들과 4천여 명의 궁신들이 살았다. 게란트(Roger-Henrl Guerrand)가 쓴 <화장실문화사(Les Lieux. Historie des Commdites)>를 보면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궁전을 출입했던 수많은 귀족들이 그들의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상상하면 그저 아찔해질 뿐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건물의 구석 벽이나 바닥 또는 정원의 풀숲이나 나무 밑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이 비단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만 일어난 것은아니었다. 파리의 유명한 샤르르 가르니에의 오페라 하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관람객들은 몇 시간이건 변욕을 스스로 참아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용기를 지참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이 14세가 그때까지 살던 파리의 루블 궁전을 버리고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옮긴 이유도 루블 궁전이 오물로 뒤덮여 더 이상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왕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화장실 외에는 베르사이유 궁전 안에 화장실이라고 불릴 만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화려한 무도회가 열렸으니 이들은 부득이 정원의 꽃이나 잔디를 밟고 용무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궁중 무도회에 초대된 귀족들은 휴대용 변기를 지참하여 생리적인 응급 대비를 하기도 했으나 오물을 비우는 일은 하인들의 몫이었다.

이들이 오물을 버리는 곳 역시 으슥한 정원 구석이었고 궁에서 생활하는 궁신들의 배설 또한 이러했다고 하니 오물로 덮힌 궁전의 실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도회에 참석할 때 여성들은 커다란 모피 주머니에 휴대용 그릇을 넣고 다녔다. 그것은 지름 25센티미터 정도의 길쭉한 도기로서 손잡이가 달린 것이었는데 하이라이스 소스를 담는 그릇같이 생긴 것이였다.

그러면 그 당시 프랑스의 일반인들은 어땠을까?

중세 도시의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집안에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응가~ 내려갑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하고 외치며, 배설물을 창 밖으로 쏟아 버렸다고 한다. 그러니 거리 곳곳은 오물 투성이였고, 현재까지 남녀가 데이트할 때 '남자는 여자의 왼쪽에 서서 걷는게 예의'라는 에티켓도 창문에서 느닷없이 날아오는 오물로 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하였다고 하니 진짜인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주머니가 가벼운 배낭 여향자들은 기차의 화장실, 맥도날드의 무료 화장실을 찾아 사용하고, 승차시 표검사를 하지 않는 점을 이용해 출발 직전의 기차에서 용변을 보고 유유히 내린다는 웃지 못할 일들도 있다고 한다. 단체 패키지 여행을 한 우리들도 독일의 한 작은 휴게소에서 화장실이 부족하여 여자분들에게 양보한 남자들이 뒷숲으로 뿔뿔히 흩어졌던 추억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탈리아 고속도로 유료 화장실의 입구(사용료 받는 곳)과 내부>




<프랑스 파리 시내의 노상 유료 공중화장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상점의 화장실>



출처 : 五反田物語(고딴다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