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화장실에서/화장실 기행

일본국제호텔화장실

      - 일본 국제호텔편
 
소위 어삼가(御三家) 호텔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 최고의 호텔을 말함인데, 그 어삼가란 오쿠라 호텔, 제국 호텔, 뉴 오타니 호텔을말함이다.
나그네는 오쿠라나의 뉴 오타니에서는 잠을 자 보았지만, 제국호텔은 아직 이용하질 못했다. 날씨가 몹씨 추운 날 동경의 싸구려 호텔에서 잠을 자고 나왔다. 동경에서 교토로 신간선을 타고 내려갈 계획인데, 시간이 세 시간쯤 여유가 생겼다. 무얼할까 하고 망설 이다가 동경에 오면 이따금씩 들르는 긴자(銀座)의 곤도 서점엘 들렀다.
  
  MBC 다큐멘터리작가
  홍하상

오전이어서 책 구경하기엔 안성맞춤인 시간. 한참 책 구경을 하고 이와나미 문고에서 나온 <페리의 원정소사>라는 문고본 한권을 산 후에 커피를 한잔 마시기 위해 긴자 거리로 나왔다. 한참 걷는데 아뿔사, 배가 아프다. 호텔에서 나오기 전에 볼일을 다 보고 나와야 하는데 그만 깜밖했다
.
자, 어디로 가서 볼일을 볼것인가.
근처의 커피 숍을 찾아 찾아갔다. 차도 시키기 전에 화장실부터 갔다. 문을 열고 보니 화장실이 너무 작다. 변기에 앉으면 무릎이 벽에 닿을 정도이다. 긴자는 그림엽서 한 장 크기의 땅이 우리 돈으로 1억 원씩 하는 곳 으로 땅값이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보니 정말 작은 화장실을 만들었다. 여기서라도 볼일을 볼 것인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불과 대여섯평 밖에 안되는 작은 커피숍에 종이장 같은 도어문 밖엔 손님들이 차를 마시고있다.
이런 곳에서는 끙 소리 한 번 낼 수도 없다. 편한 마음으로 볼일을 볼 수 없는 곳이다.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문득 제일 편하게 일을 볼 수 있는 곳은 호텔 화장실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긴자에서 가까운 호텔 중에 손님이 무시로 출입할 수 있는 호텔은 어디인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잠시 생각해 보니 그곳은 제국호텔 이었다. 그렇다. 제국호텔로 가서 볼일을 보자. 하지만 걸어서 가기엔 먼 기본요금 거리 정도여서, 택시를 잡아타고 지하 1층에 있는 화장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화장실에는 향수 냄새가 은은하다. 타일이 붙여진 바닥은 청결하기 이를 데없다. 화장실 안의 온도도 25도 정도는 될 것 같다. 엉덩이를 까고 있어도 전혀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쾌적 그 자체이다.볼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쾌적함, 안락함, 청결함의 세 요소를 모두 다 갖추었다.
과연 어삼가의 명성에 맞는 호텔이다
.신문이라도 한 장 있으면 덜 무료하겠는데 그건 없다.아쉬운대로 제국호텔에 왔으니 내가 알고 있는 이 호텔의 역사를 한 번 생각하면서 볼일을 보기로 했다.

제국호텔은 동경 최초의 호텔이다. 제국 호텔을 지은 사람은 오쿠라 기하치로라는 자인데, 이자는 메이지 시대(1868∼1912)에 미쓰비시, 미쓰이 재벌과 더불어 오쿠라 재벌로 불리우던 일본 3대 재벌의 하나이다.그는 본래 니이가타의 건어물 도매상의 점원 출신인데, 메이지유신 때 무기판매로 떼돈을 벌었다. 그는 수십개의 회사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 일본 최대의 건설회사인 대성건설이다. 또한 이 자는 조선 땅의 김제에도 수십만평의 논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나라의 선린상고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자의 악명은 〈오쿠라 콜렉션〉 이다. 이른바 오쿠라 콜렉션은 일제 때 조선에서 반출해간 5만점 이상의 유물이 그 중심이다. 한마디로 문화재 도둑인 것이다. 그 자가 만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제국호텔이다.그때가 1891년 쯤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구미 각국의 외교사절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당시 이등박문이 그에게 현대식 호텔을 한채 지을 것을권했다.


외교사절들을 만나서 커피도 마시고, 담소도 하면서 로비를 하기 위해서는 호텔이 하나쯤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제국호텔이 지어 졌는데, 실제로 이등박문은 이 호텔이 지어지고 나서 거기서 자주 식사를 했다. 오늘날 이 호텔은 한국의 VIP들이 자주 이용하는 호텔이기도 하다.제국호텔이 지어지기 전에 이 자리에는 동경여관이라 는 여관이 있었다. 이 여관 의 장기 투숙객의 한사람 으로 김옥균이 있었다. 그는 갑신정변에 실패한 망명객 으로 일본에 건너와서 이 여관에 한때 숙소를 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제국호텔 자리에서 잠을 자주 자던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그 다음으로 아마도 故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이 이 호텔을 자주 이용한 분이었던 것 같다. 장기영 회장은 이 호텔의 커피숍에서 역시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건축가 김수근을 만났다. 당시 김수근은 동경대 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하던학생.
그의 비상한 재능을 알아본 장기영 회장은 그에게 학비와 용돈을 대주고 있었다. 바로 그 학비와 용돈을 전달해 주던 곳이 이 제국호텔 커피숍이다.
그런 경우가 또 있다. 남방개발의 사장이자, 오늘날 코데코 에너지를 설립한 최계월 회장도 이 호텔에서 오늘날 在日 화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화가 이우환씨에게 그림 물감 값과 술 값을 이 호텔에서 대 주었다.

오늘날 이 호텔을 장기 이용하고 있는 일본의 유명인사 중의 한사람은 50대의 오치하이 노부 히코 라는 일본인이다.이 사람은 국제적인 저널리스트로 그가 쓴 책 50여권이 모두 베스트 셀러이고, 책방에는 〈오치하이 노부히코 서가〉가 따로 있을 정도 로 필명을 날리고 있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1년에 6개월 정도를 이곳에 장기투숙 하면서 집필을 하고 있는 인물로 유명하다.

아웃 풋을 하면서 이쯤하니 볼일이 끝났다.


자, 이제는 나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 할 차례. 헌데 물을 내리려고 보니 물내리는 변기꼭지가 없다. 낭패였다. 그때부터 나는 눈을 부릅뜨고 화장실 안의 모든 기물을 점검해 나갔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벨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틀림없으리라는 판단이었다.혹시 비상벨이 아닐까 하면서 벨을 누르는 순간,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작년 1월의 제국호텔 화장실의 일이었다.

자, 다음 호에도 세계의 화장실을 찾아 떠나보자.

홍 하 상 (MBC 다큐멘터리 작가)
·1955년서울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졸
·’90 MBC 방송대상 작가상수상
·’98 방송위원회 우수기획상〈금강조 1400년의 약속 어떻게 지켰나〉
·작품 : 〈명작의 무대〉, 〈명시기행〉, 〈세계의 교육, 그 현장을 가다
<그때를 아십니까〉등 다큐멘터리 270여편
·저서 : <일본뒷골목 엿보기〉, 〈열두겹 기모노의 속사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