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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화장실 이야기

캘리포니아 화장실에서의 사색


언젠가 금강휴게소 화장실 소변기 위에서 삼상(三上)이라는 봤다가 그 내용이 하도 웃겨서 기억해 뒀다. 생각이 잘 떠오르는 세 가지 장소가 바로 말 위(馬上), 침대 위(寢上), 변소 위(厠上)라는 거다. 나 역시 오늘 공강 시간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문득 두 가지씩이나 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나. 그 깨달음이란 첫 째, 이 삼상의 법칙 일찍이 발견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시공을 초월한다는 점, 둘 째, 21세기를 사는 인간의 경험은 그 다른 어느 시대보다 기괴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이 사실을 공강시간 UCSD 캠퍼스의 어느 공중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깨달았다.

미국 화장실에는 한국에는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들자면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는 접이식 테이블이 비치되어 있다는 점과, 소변기의 높낮이가 다 다르다는 점, 그리고 좌변기 칸마다 1회용 종이 시트커버 디스펜서가 비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금 하려는 얘기는 이중 마지막의 시트커버 디스펜서와 관련한다.

나는 이 칸마다 배치된 1회용 시트커버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왜?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요도 없는 게 왜 이렇게나 가시는 화장실마다 많이도 있을까? 그건 아마 난 아니라도 이 사람들에겐 필요한 거니까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고 저도 사람이다. 한 사람은 필요 없고 한 사람은 필요한 게 도대체 뭘까? 나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왜 필요한 걸까?

germ, 즉 세균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세균이 한국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세균보다 훨씬 징글징글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에서 TV를 두 시간만 보면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TV 광고의 삼분의 이는 넘어 보이는 약 선전, 비누 선전 속의 레퍼토리는 하나같이 다 똑같다. “현미경을 들이대니 어라, 세균이 많네! 그렇게 살지 말고 우리 약 먹어봐! 자 이제 깨끗하지?”다. 그래서 미국인은 제약 회사 혹은 비누회사의 광고를 통해 새로이 세균에 대한 공포를 주입받는다. “세균을 죽여 없애자!”라는 brainwash를 당한다. 나와 면접을 하던 다이애나 아줌마가 기침을 살짝 해놓고는 굳이 “germ”을 튀겨 미안하다는 해괴한 사과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땅의 유치원생들이 초록색의 못생긴 세균을 그리고 그 밑에 “Germs are in the air, on your hands, on your feet, and they can get on the foods we eat!”라는 문구를 적은 포스터를 만들고 칭찬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미국인은 확실히 한국인보다 세균이 무섭다. 미국인의 머리 속에 그려진 화장실의 중요한 한 부분이 1회용 종이 시트커버 디스펜서인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도 이 지점이다. 미국인은 세균이라는 보이지 않는 악의 축이 두려운 것이다.
 
  세균은 공기에도 있고 손에도 있고 발에도 있어요. 먹는 음식에도 있어요.


여기에는 미디어 사회의 놀라운 매커니즘이 개입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에 의해 자신이 “영향”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시트를 타고 세균이 스멀스멀 내 엉덩이를 타고 오르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무서운 체험이지만,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나는 시트커버를 깔지 않고 좌변기에 앉아있는 내가 문득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놓았다. 언젠가 네이버 뉴스에서 ‘좌변기에 의외로 세균이 없다는 연구결과’에 대한 기사를 떠올랐기 때문이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깜짝 놀란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나조차도 판단을 네이버 1면에 유보해놓고 있는 게 아닌가! 세균이 두려운 것도, 세균이 두렵지 않은 것도 나의 선택이 아니었던 것이다.

네이버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많은 “연구결과”가 우리의 눈을 현혹한다. 이게 좋다더라, 이게 나쁘다더라, 저게 좋다더라, 저게 나쁘다더라. 그러면 우리는 ‘이게 나쁘구나.. 저게 좋구나.. 이게 나쁘다잖냐, 저게 좋다잖냐’ 한다. ‘권위있는 박사님께서 하신 말씀이라 하잖냐’ 한다. 같은 유전자 콩을 놓고 한쪽에서는 위험하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안전하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유전자 콩은 절대 안 먹는데 반하여, 또한 편 어떤 사람은 별 걱정 없이 잘만 먹는다. 이러나 저러나 ‘박사님의 말씀’이 머리에 들어와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해 주신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E-편한세상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역사가 지향해온 바가 유토피아니까. 하지만 이렇게 점점 편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을 느끼지 못하는 개구리처럼, 판단을 네이버에, 조선일보에, 또 시트콤 논스톱에 아웃소싱하는 경향 역시 점점 커지고 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겪지도 않은 일을 경험했노라고 착각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내 경험이 매체의 경험에 의해 잠식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인터넷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 1994년 무렵이었던가. TV는 60년대 정도인 것으로 안다. 신문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였을 거다. 신문도 TV도 인터넷도 없는 세계와, 신문을 보며 이명박을 욕하고, TV에서 무한도전을 보며 낄낄거리고, 싸이를 뒤지며 남 삶을 옅볼 수 있는 세계는 과연 어떻게 다를까? 활자매체의 전파에 힘입어 소위 미디어라는 것이 대중화 된 이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한번도 의식해 본 적이 없던 것을 의식한다. 네오와 미스터 앤더슨의 이중생활처럼 우리가 서로 다른 두 세계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그 한쪽의 세계에는 평생을 함께 해온 가족과 오랜 친구가 있고, 매일같이 학교와 집을 이어주는 버스가 있으며, 서너 군데쯤의 자주 들르는 단골집이 있다. 그 반대편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박지성이 국위를 선양하고,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오바마와 힐러리가 접전을 벌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시가 한번도 본 적 없는 이명박을 만나고 있는 세계다. 일상이라는 물리적인 세계와 매체라는 붕 떠있는 간접의 세계가 서로 하나가 됐다가 둘로 분열이 됐다가 서로 확대 재생산 됐다가, 서로 완전히 관계 없는 것으로 되었다가 한다. 어디까지가 내가 사는 세계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살지 않는 세계인지가 모호해진다. 어디까지가 나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남의 생각인지가 모호해진다.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이, 미디어를 통해 경험되는 중요해 “보이는” 것들에 의해 가리워진다. 신문도, TV도, 인터넷도, 라디오도 없던 1800년대를 살았던 사람의 삶은 지금보다 편하진 않았을지 몰라도 훨씬 ‘자기’에게 충실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 때의 사람들이 지금과 같이 여러 다양한 경계가 복잡하게 중첩되고 혼선되는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세상이 힘들게 돌아가도 곰실슈퍼 아저씨와 담배를 피우며 농담을 주고받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행복하지 않았던가.

소고기, 부시, 이명박 대운하와 삼성 특검에 이르기까지 점점 미쳐 돌아가는 것으로만 보이는 네이버 속의 한국을 보면 경악하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다가 한편으로 이게 아냐, 내가 겪은 게 아니잖아! 하고 스스로를 위안하곤 한다. 아귀다툼장인 것처럼만 보여서, 그래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한국도 사실은, ‘구체적으로 겪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에 오기 전의 삶을 떠올려 봐도 내가 실제로 겪는 구체적인 세계는 매체를 통해 접하는 세계와 중첩되는 부분보다 그렇지 않는 부분이 더 컸으니 말이다.

한편 이게 강건너 자기집에 불난 것을 구경하는 집주인의 자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파도는 서로의 영역을 서로 침투하며 확대 재생산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또 다른 파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개인의 불안은 신문지면에서 네이버 첫화면에서 사회의 불안으로 확대되고, 이것은 다시 개인의 불안으로 다시 커지기 때문이다. 닭이 먼저일까, 계란이 먼저일까. 헷갈리는 세상이다.

이런 분열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18세기 이전을 살았던 사람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를 한 가지 삶의 기술이 더 필요하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아닌지, 나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 지, 서로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여러 현실의 파도에서 어떤 물살을 탈 것인지, 어느 지금과 어느 현재에 임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복잡한 파도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는 서핑의 테크닉이, 삶의 균형을 잡는 기술이 필요하다.



출처 : godlovesugly.tistory.com/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