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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화장실 이야기

'화장실' 당신은 거기서 뭘 하십니까?

[나도 기자] '화장실' 당신은 거기서 뭘 하십니까?
오늘날 하이힐은 여성만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한 필수품. 하지만 그 유래는 그다지 고고하지 않다. 베르사유 궁전이 있던 시절, 처음 하이힐이 등장했다. 당시 귀부인들은 화장실이 없어 대소변을 아무데서나 해결해야 했는데, 땅이 오물로 질척거리게 되자 긴 이브닝드레스에 오물이 묻지 않도록 발바닥을 땅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수단으로 하이힐을 신기 시작했던 것.

대다수 사람들은 '화장실'에 대해 언급하기조차 꺼리는 경우가 많다. 냄새나고 더럽고 어두운 곳이며, 변을 보는 자연스러운 행위조차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세기동안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화장실. 그 감춰진 공간을 들여다봤다.

◇ 오늘도 화장실에서는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교수님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간다. '어휴, 생리 현상을 참느라 혼났네.' 화장실 문을 열고 변기를 발견하니 마음마저 편안해진다. 볼일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눈 앞에 여러 글귀들이 보인다. 요즘 어느 건물 화장실을 가더라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광고글.

처음 대학에 왔을 때 신기했던 문화 중 하나가 바로 화장실 벽에 '자원봉사 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등의 안내글이었다. '이것 참 괜찮은 홍보 방법이네. 나도 나중에 한 번 써먹어 볼까나.' 그런데 요즘 화장실은 워낙 깨끗하게 관리해서인지 낙서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직도 북부정류장 화장실에는 낯 뜨거운 낙서와 글귀들이 많이 있던데.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계속 눈이 가던 건 무슨 이유였을까? 몇 달 전 우리 학교 도서관 화장실에서도 '취업이 먼저일까, 결혼이 먼저일까'라는 낙서를 본 적이 있다.

혼자 이런저런 잡념에 빠져있자니 학생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선배, 정말 괜찮지 않니?" "괜찮긴, 뺀질뺀질하게 생겨서는 수업 시간에 잠만 자던 걸!" 화장실에서 볼일만 보면 될 걸 별 이
야기를 다 하네. 앗, 그러고 보니 벌써 다음 수업 시작 시간이네. 그나저나 나는 화장실에서 십오분 동안 뭘 한거야.

◇ 광장인 동시에 나만의 밀실, 화장실
"화장실에 가면 무엇을 하느냐?"는 물음에 박민영(경북대 3년) 씨는 "운다."고 했다. 여자가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드라마에서도 흔히 볼수 있다. 시어머니에게 매몰차게 야단맞거나 직장 상사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은 뒤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남 몰래 눈물을 훔치곤 한다. 이진희(경북대 2년) 씨는 "화장실이 남들과 자신을 차단하는 폐쇄적인 공간이기에 비밀 장소 기능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차마 남들 앞에서 울 수 없을 때 화장실은 가슴 속의 슬픈 멍울을 풀어낼 수 있는 '광장 가운데 밀실'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화장실은 독서실이 되기도 한다. 시험시간이 다가올 때 교실 분위기는 긴장감으로 팽팽해지기 마련. 다른 이들의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중얼중얼 소리를 내며 외우거나 친구와 잡담하는 친구들이 있다. 이럴 때 화장실이 제격이다. 좁은 공간 안에서 빼곡히 적힌 글자들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나 뿐인 듯한 착각이 든다.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내 눈을 끌 만한 특별한 물건도 없어서 그만큼 집중도 잘 됐다. 이는 의학적으로 증명된 것이기도 하다.

가끔 화장실은 온갖 험담이 오고 가는 '살아있는 현장'이 된다. 역시 드라마에서 자주 접하는 장면 중 하나. 화장실에서 두 신입사원이 부서 상사를 흉보고 있을 때, 화장실 칸막이 안에는 꼭 그 상사가 이야기를 듣고 있기 마련이다. 송은정(경북대 2년) 씨는 "고등학교 때 화장실 벽에서 선생님을 욕하는 내용의 낙서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나 학생들에게 유독 얄미워 보이는 선생님을 속된 말로 마음 놓고 '씹을' 수 있는 곳으로 단연 화장실을 들 수 있겠다.

아울러 화장실은 '사색의 공간'이자 '작은 도서관'이 되기도 한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는 짧은 시간만큼은 사회로부터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볼일을 보는 동안 가만히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한 걱정부터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심각한 고민까지. 화장실에서 사람들은 혼자 온갖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진 외로운 철학자가 된다. 집중해서 책을 읽기에도 화장실은 안성마춤이다. 요즘 가정집뿐만 아니라 음식점 등에 가더라도 화장실에서 책 몇 권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 인간 내면의 욕망을 풀어내는 화장실 낙서
학교 화장실 벽에는 사람을 모집한다는 광고부터 행사 안내 문구까지 다양한 글들이 붙어있다. 얼마 전 갔던 찜질방 화장실 벽에는 '쌍꺼풀 영구 시술해 드립니다', '부분별 맞춤식 다이어트, 효과 100% 보장!' 등의 광고가 붙어 있었다. 또 공공터미널 화장실에서는 '장기매매 알선합니다'라는 문구를 쉽게 볼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앞에 적혀 있는 글을 보게 될테니, 화장실 벽은 그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알림터라고도 할 수 있다.

광고 외에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흔적은 바로 낙서다. 번호 하나를 지워놓아 여러 경우의 수를 추측하게 만드는 미완성의 휴대폰 번호는 물론 '오른쪽으로 고개 돌려봐, 바보야. 여기가 왼쪽이지 오른쪽이냐?'는 실없는 농담까지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면서도 은밀한 관심을 끄는 것은 다름 아닌 원색적인 그림이다. 화장실 벽은 난잡한 성행위 그림부터 낯 뜨거운 음담패설까지 포함한다. 대다수는 동성애, 근친상간 등 제도권에서 금기시하는 인간의 숨은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화장실이라면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도색 그림들은 그림 형태와 내용 등이 놀랄만큼 닮아있다.

이런 도색 그림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무조건 남녀 관계 중심이었다면, 요즘은 점차 동성애 그림이 증가하고 있다. 성관계에서 무조건 수동적으로 표현됐던 여자가 적극적인 자세로 그려지는 것도 큰 변화 중 하나.

도색 그림에서는 누구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혼자 있을 때면 여지없이 드러나는 인간의 숨겨진 내면의 단편이 드러난다. 이찬우(경북대 3년) 씨는 "표출하고 싶지만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것들을 화장실 벽이라는 공간을 빌어 표현하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우리들. 억제하고 싶지만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은 아무도 보고 있지 않지만 또한 누구나 볼 수 있는 화장실 벽에서 표출되고 있다. 도색 그림이 제도권 내에서 건강하게 해소되지 못한 성적 욕망을 표출하면서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면 이를 그저 거북스럽게만 대할 필요는 없는게 아닐까? 아니, 오히려 권장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잡스러운 생각을 하며 기자는 화장실에 앉아서 궁상을 떨어본다.


이주현 시민기자

* 이번주 '나도 기자' 코너의 시민기자는 이주현(22.여)씨는 경북대신문사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경북대 지리학과 2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이지요. 아무래도 학보를 만들면서 기사를 써 본 경험이 많다보니 하고싶은 말도, 쓰고싶은 이야기도 많았다고 합니다. '화장실'이라는 주제는 경북대신문을 통해 꼭 한번 다뤄보고싶은 이야기였는데 아직까지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네요.



작성일: 2007년 03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