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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로 보는 미술 : 베르메르

 테마로 보는 미술 :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 베르메르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는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와 함께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인 17세기를 대표하는 세 명의 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베르메르는 다른 대가들에 비해 다루었던 주제도 한정되어 있고, 작품 수도 적고, 작품 크기도 작다. 그러나 베르메르 특유의, 정교하게 구성된 햇빛 비치는 고요한 실내 정경 그림은, 친숙하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그는 그 이전과 이후 어떤 화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 이미지는 현대인의 감각에도 구식으로 보이지 않아 그 작품들의 대중적인 인기는 날로 커가고 있다.

베르메르의 부친은 운하와 맥주, 모직물, 도기로 유명했던 네덜란드의 도시 델프트에서 직물업, 그림 매매, 여관업을 겸했던 레이니어 얀스존(Reynier Jansz.)이다. 베르메르라는 성은 1625년경 이후가 되어서야 사용하기 시작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21살이 되는 1653년에 델프트의 성 루가 길드에 가입하여, 자기 이름으로 작품에 서명하고 이를 판매하고 제자를 둘 수 있는 장인의 권리를 얻었다. 길드에 가입하려면 길드가 인정한 화가 밑에서 6년 이상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늦어도 15살 때부터는 그림 수업을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화가로 독립한 이 해에 그는 카타리나 볼네스(Catharina Bolnes)와 결혼했다. 베르메르 가족은 1660년부터 장모 집으로 들어가 살았고, 그 집에 화가의 작업실이 있었다. 베르메르 부부는 20여 년의 결혼 생활 동안 15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넷은 어려서 죽었다. 아이들은 당시 네덜란드 가정의 평균 자녀 수인 2명보다 훨씬 많았지만, 작품은 그렇게 많이 만들지 못했다. 그의 작품 제작 속도는 느린 편이었다. 그는 일 년에 평균 두세 점 정도의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시장에 내놓지 않고 후원자나 애호가에게 판매했다. 당시에 그는 인정 받는 화가여서 작품의 가격은 비싼 편이었지만, 수가 적어 자신의 그림 판매만으로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시 네덜란드의 많은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여관을 경영했고, 다른 화가의 그림을 감정하고 판매하는 화상의 역할도 했다.

그는 당대와 후대인에게 얀 베르메르(Jan Vermeer), 야콥 판 데르 메르(Jacob van der Meer), 얀 판 데르 메르(Jan van der Meer), 베르메르 판 델프트(Vermeer van Delft)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작품마다 서명도 조금씩 다르게 했지만, 공식 문서에 서명할 때는 요하네스 베르메르라고 썼다. (그 지역의 발음은 ‘페르메르’에 가깝다.) 베르메르는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적을 뿐 아니라 작품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베르메르 작품 중 진위 논란 없이 확실한 그의 그림은 유화 32점뿐이다. 그중에서 제작연도가 분명한 작품은 3점밖에 없어, 베르메르 작품의 제작 시기는 양식의 변화를 통해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초기에 그는 성서 주제 그림과, (진위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신화 주제 그림을 그렸지만 곧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 장면을 그린 장르화(Genre painting)로 관심을 옮겼다.


인생의 연극 무대

베르메르가 1656년에 그린 [뚜쟁이 The Procuress]는 제작 연도가 확실한 최초의 작품이다. 화면에는 술잔을 쥐고 앉은 노란 옷의 젊은 여인, 그녀를 안고 돈을 건네는 붉은 옷의 남자, 이 둘을 지켜보는 검은 옷의 뚜쟁이, 술잔과 악기를 들고 관람자를 보고 웃는 악사가 보인다.

그림의 주제는 네덜란드 장르화에서 자주 다루어지던 ‘매춘 장면’이다. 이 주제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탕자 이야기와 연관된 종교적 의미를 갖기도 하고, 매춘굴에 들락거리다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도덕적 교훈을 담고 있는 것으로도 읽혔다.

이 그림의 탁자와 카펫, 인물들이 만드는 공간은 부자연스러워 설득력이 좀 떨어지지만, 이후에도 지속될 빛과 대상의 질감에 대한 화가의 관심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카펫이 덮인 탁자는 그림의 등장인물과 관람자를 격리시켜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거리감을 만들어 낸다. 당시 네덜란드 풍속화는 일종의 시각화된 희극으로 여겨졌다. 관람자를 바라보며 그림 속으로 안내하는 악사의 웃음도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람을 베르메르의 자화상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뚜쟁이]는 이후에 나오는 베르메르 그림에 비해 크기도 크고 분위기도 소란스러운 편에 속한다. 전형적인 베르메르식 작품은 작은 캔버스에 중산층 가정의 실내를 그린 그림이다. 같은 시기 다른 장르화와 대조적으로 등장 인물의 수는 적고, 분위기는 고요하다. 인물은 거의 여성이며 이들은 관람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일을 하거나 생각에 잠겨 있는 경우가 많다.

 

 

[뚜쟁이] 1656년, 캔버스에 유채, 143×130cm, 국립 미술관, 드레스덴

 

 고요하고 엄숙한 일상의 순간

 

[뚜쟁이]가 ‘악덕’을 비판하기 위해 그려진 작품이라면, [우유를 따르는 여인 The Milkmaid]은 소박하고 진중하게 맡은 일에 열중하는 ‘미덕’의 모범을 제시하는 그림이다. 화면에는 하녀로 보이는 여성이 주전자에서 그릇으로 우유를 따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역시 주제는 네덜란드 장르화에서 많이 다루어지던 ‘부엌 그림(Kitchen painting)’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나, 많은 음식물들이 번잡하게 등장하는 다른 그림들과 달리 이 그림의 모든 것은 간결하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 1658년경
캔버스에 유채, 45.5×41cm, 국립 박물관, 암스테르담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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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에는 아무 장식도 없고, 음식은 빵과 우유뿐이다. 유순하고 소박한 모습의 여성은 침착하게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 평생 수만 번은 하게 될 사소하고 단순한 일상사인 우유를 따르는 동작이, 그 순간이, 그림 속에 고정되어 엄숙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의미의 무게를 갖게 되었다. 실제로 우유는 신자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할 ‘순전하고 신령한 젖’(베드로전서 2장), 빵은 스스로를 ‘생명의 빵’(요한복음  6장)으로 불렀던 예수와 연결되는 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우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고요한 분위기인 이 그림의 또다른 주인공은 왼쪽 벽의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다. 빵을 중심으로 한 사물에 떨어지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화가는 특유의 점묘 기법을 사용했다. 이런 점묘가 사진의 초점 부위를 벗어난 사물의 모습과 닮았고, 전반적으로 그의 그림이 너무도 사실적이라는 점 때문에 화가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었다.

오늘날 사진기의 조상격인 카메라 옵스큐라는 빛을 작은 구멍으로 통과시켜 벽이나 유리판에 이미지를 투사하는 기구이다. 베르메르는 당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발전한 광학을 비롯한 과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고, 그 산물인 여러 기구를 그림 그리는 데 동원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카메라 옵스큐라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캔버스에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만의 공간과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원근법도 왜곡하고 사물의 크기와 배치도 실제와 다르게 조정했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의 탁자도 뒤로 갈수록 폭이 넓어져 원근법의 원칙과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즉 사실적이면서도 시적인 독특한 화면을 구축한 가장 중요한 원칙은 그의 예술적 감수성이었다는 것이다.


델프트에 대한 경의, 그 노란 벽

[우유를 따르는 여인] 뒤에는 발 난로가 놓여 있고 그 벽 굽도리에는 파란색 큐피드 그림이 그려진 흰 타일이 붙어 있다. 이것은 당시 델프트 장인들이 창안하여 인기를 끈 청화백자 모양의 타일이다. 17세기 초에 중국의 자기가 네덜란드에 처음 소개된 이래 중국의 자기, 특히 청화백자는 네덜란드 가정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를 보고 서양에서도 중국 자기 비슷한 것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델프트는 청화백자와 비슷한 외양을 가진 도기 생산의 중심지였다. 오늘날까지 ‘차이나’가 도자기 그릇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것처럼, 이때부터 ‘델프(delf)’라는 말 역시 그릇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가 될 정도였다. 델프트에서는 중국에는 없던 청화백자 스타일의 타일을 발명해 냈는데, 이 그림에서 보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에서 흔적이 보이던 화가의 고향 델프트에 대한 애정은 그가 그린 풍경화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델프트 풍경] 1660~61년경, 캔버스에 유채, 96.5×115.7cm, 마우리트하위스, 헤이그

베르메르는 단 두 점의 풍경화를 남겼는데 그 중 하나인 [델프트 풍경 View of Delft]에는 그가 태어나 평생을 살다 죽은 델프트라는 도시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풍경화(landscape)와 도시경관화(townscape)가 그려졌지만, 이 작품은 기존의 작품들과 다른 아취를 가진 독특한 ‘도시의 옆모습’이다.

화면에 담긴 것은 도시의 남쪽 끝 스히(Schie) 강 건너에서 도심이 있는 북쪽을 바라본 풍경이다. 때는 화면 중앙에 있는 스히담 수문(Schiedam Gate)에 붙어 있는 시계가 7시 10분을 가리키는 이른 아침이다. 스히담 수문 왼쪽에 보이는 것은 구교회(Oude Kerk)의 첨탑이고, 수문 오른쪽에서 아침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은 이 도시의 상징적 중심인 신교회(Nieuwe Kerk)의 첨탑이다.

 

오른쪽에 정박 중인 배에 떨어지는 햇살을 표현한 점묘, 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부분과 구름 그늘 아래 있는 어두운 부분의 절묘한 대조에서 보이듯, 이 작품은 공기와 빛을 조화로운 색상과 안정적인 구도 속에 담아낸 걸작이다. 또 이 작품에는 베르메르의 주조색 중 하나인 노랑이 매혹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중 신교회 오른쪽으로 보이는 작은 노란 벽은 마르셀 프루스트 때문에 유명해진 부분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5편 ‘갇힌 여인’에서 작가 베르고트는 이 그림을 보다가 죽었다. 오래 앓던 베르고트는 안정하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았음에도 파리에 와 전시된 이 그림을, 이 그림의 노란 벽을, 보기 위해 무리를 해서 미술관을 찾는다. 작품 앞에서 “드디어 노란색인 작은 벽면의 값진 마티에르를 발견”한 그는 “나도 이처럼 글을 썼어야 했”다고 말하다 쓰러져서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인생의 한구석을 비추는 푸른 빛


노랑과 함께 베르메르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색깔은 파랑이다. 화가가 절정의 기량을 발휘한 1660년대 작품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Woman in Blue Reading a Letter]에서 두드러진 것도 바로 이 파란색이다.

이 시기 작품에서는 [뚜쟁이]에서 볼 수 있는 두터운 물감의 임파스토(impasto)나 [우유를 따르는 여인]에서 발견되는 점묘와 같은 촉각적인 요소가 줄어들었다. 화면은 부드러워지고 색조는 섬세해졌다. 구성의 군더더기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번잡한 디테일이 없는 것은 베르메르 작품 전반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나, 이 시기 작품에서 그런 성격이 극대화되었다.

이 작품에서 인물은 단 한 명으로 줄어들었고, 그의 실내에서 언제나 왼쪽 벽의 일부였던 창문도 이번에는 보이지 않고 빛으로 암시만 되고 있다. 그 빛은 여성이 입은 옷이나 의자에 댄 천을 닮은 푸른 색조의 그림자를 벽에 드리우고 있다. 하이라이트 없이 온화하고 자연스러운 이 빛의 효과가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여인의 뒤로 보이는 지도나 빈 의자, 탁자 위의 진주 목걸이, 임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여인의 몸매 등으로 편지의 내용과 인물의 심리 상태를 짐작하는 글들도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크게 의미도 없다. 작은 캔버스에 선명하게 그려진 부분 하나 없는 이 여성의 실재감은 그림 앞에 선 사람까지도 입을 다물고 숨을 죽이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 그러나 그 실재감은 그림 속 세계와 관람자 사이의 거리를 좁혀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저 여인의 사적인 공간과 그녀의 개인적인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녀와 같은 침묵으로 그 순간을 방해하지 않고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의 인생에도 이런 방의 한구석과 이렇게 내밀한 고독의 순간이 있다.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1662-3년경 캔버스에 유채,
46.5×39cm, 국립 박물관, 암스테르담


그 점에서 우리는 그녀와 동질감을 느끼지만 함께 느낄 수는 없다. 베르메르의 그림이 손에 만져질 듯 사실적이고 친숙하면서도 범접하기 어려운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이 20세기 이후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매혹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저울을 든 여인 Woman Holding a Balance]은 양식적으로는 [푸른 옷의 편지를 읽는 여인]과 유사하나 보다 전통적인 주제를 담은 그림이다.

커튼을 통해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방의 한구석에 한 여성이 저울을 들고 서 있다. 인물 앞의 탁자 위에는 열린 보석함에서 나온 진주 목걸이와 은화, 금화가 보인다. 여인의 앞에는 거울이 걸려 있고, 그녀의 뒤편으로는 최후의 심판주제 그림이 보인다.

죄의 무게 혹은 영혼의 무게를 다는 도구라는 의미에서 저울은 최후의 심판과 함께 자주 등장해 온 소재다. 거울과 보석은 허영의 상징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허영을 삼가고 심판을 대비하라는 종교적인 알레고리가 이 그림의 주제이다.

저울로 귀금속이나 보석의 무게를 다는 장면은 네덜란드 장르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자 일상의 장면이기도 했다. 당시는 표준 통화가 없던 시절이라 동전의 액면가가 아니라 금화나 은화에 포함된 귀금속 값이 실제 가치였다. 무른 금속인 금과 은은 사용하면서 닳아서 무게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실제 가치를 알려면 저울로 달아 봐야 했다. 가족의 재산을 정확히 계산하는 행위는, 재산 축적이라는 당시의 새로운 미덕과 조화를 이루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림 속 여인이 든 저울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저울을 든 여인] 1664년경 캔버스에 유채, 42.5×38cm,
국립 미술관, 워싱턴 D.C.
그저 그 저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다. 편지를 읽는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저울을 든 여인의 내면도 구경하는 사람의 침투가 불가능한 사적인 영역인 것이다.


역사화를 그리고 있는 장르화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1665년경
캔버스에 유채, 44.5×39cm,  마우리트하위스, 헤이그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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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그림은 그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인물의 얼굴만을 클로즈업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이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매혹적인 모습과, 윤곽선 없이 부드러운 색조 변화로 모델링한 기법이 레오나르도가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려낸 초상화를 연상시켜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 불리기도 한다.

베르메르가 그린 거의 모든 인물들은 간소하나마 스토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배경 속에 있으나 이 그림에는 배경이나 소도구가 없다. 또 다른 작품들에서 저만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인물들과 달리 이 여성은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성격은 초상화가 아니라 트로니(Tronie) 곧 특징적인 분장과 표정을 한 인물화라고 할 수 있다. 베르메르 특유의 노랑과 파랑으로 채색된 의상과 터번 외에 관람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왼쪽 귀에 매달린 커다란 진주이다. 관람자의 눈길을 뗄 수 없게 하는 매력을 가졌으나, 명확히 드러난 것이나 뭔가를 알 수 있는 실마리가 없어서 호기심과 신비로움과 더해지는 작품이다.

베르메르의 모든 작품들이 다소 그러하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는 그림을 처음 본 사람이나 전문가나 알고 있는 것의 차이가 거의 없다. 그런 상황이 허락하는 상상의 가능성이 이 작품을 대상으로 소설이 나오고 영화가 만들어지게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포함한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조명과 드라마 같은 요소는 피터 그리너웨이 같은 영화 감독에게 거듭 영감을 주었다.


[회화 예술] 1666~67년경
캔버스에 유채, 120×100cm, 미술사 박물관, 빈
ⓒ GNC media / bpk / Wien, Kunsthistorisches Museum 
BPK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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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의 작품 중 일상생활을 담은 장르화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작품은 [회화 예술 The Art of Painting](화가의 아틀리에)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다른 그림들에 비해 크기도 크고 세부에도 더 공을 들였다. 죽을 때까지 작가가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 작품에 대한 그의 애착을 보여준다. 그림 속 공간은 왼쪽에서 햇빛이 들어오는 실내의 한구석으로 그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하나,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일상적인 활동이 아니라 모델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모델은 월계관을 쓰고 트럼펫과 두꺼운 책을 들고 있다. 이 물건들은 영광과 명예를 나타내는 것으로 역사의 뮤즈인 클리오(Clio)의 상징물(attribute)이다. 화가는 역사를, 그런 알레고리가 들어 있는 역사화를 그리는 중이다. 그런데 그런 작업이 장르화의 일상 공간 안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장르화의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1663년에 델프트를 방문했던 프랑스의 한 귀족은 베르메르를 찾아갔다가 화가가 그림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근처 빵집에 가서 그의 그림을 보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화가는 자신에게 그림을 주문하려고 찾아온 사람에게 자신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예시와도 같은 작품을 하나 만들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벽에 걸린 독립이전 네덜란드 지도, 지도의 주름,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징인 머리 둘 달린 독수리 장식이 있는 샹들리에, 탁자 위에 놓인 조각과 직물과 종이들, 이 모든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젖혀진 전경의 육중한 커튼 모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추출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져 왔으나 늘 그랬듯 그의 작품에는 명쾌하지 않은 모호한 부분이 항상 남아 있다.


화제의 중심에 있는 현대적인 작가

1672년 네덜란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미술 시장은 무너졌고 베르메르의 주 수입원이었던 그림 매매는 되지 않았다. 장모의 소유였던 소작지가 수몰되어 소작료도 받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경제적 곤궁 속에서 괴로워하던 그는 43세가 되는 1675년,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여 델프트의 구교회(Oude Kerk)에 묻혔다.

베르메르는 델프트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았고 높은 가격으로 수집가들의 후원도 받았으나 기록에 남은 제자나 크게 영향을 준 동시대 화가가 없다. 18세기에도 그의 작품이 간간히 거래되긴 했으나 이름은 거의 잊혀졌다. 1822년 헤이그에 새로 개관한 국립미술관인 마우리트하위스가 [델프트 풍경]을 2천9백 길더라는 거금으로 구입하면서 네덜란드에서 그에 대한 국가적인 존경이 시작되었다.

19세기에 들어 프랑스에서 사실주의가 일어나면서 일상생활을 그린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또 인상주의 형성기에 베르메르가 재발견되었는데, 만져질 것 같은 사실성, 시각에 대한 충실성, 사소한 순간을 영원화한 점 등이 이들에게 호소력 가졌다.

그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테오필 토레(Theophile Thore)가 빌렘 뷔르거(Willem Burger)라는 필명으로 1850~60년대에 발표한 글들을 들 수 있다. 1848년 이후 프랑스를 떠나 망명 중이던 급진적 공화주의자였던 그에게 베르메르의 그림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품위 있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가졌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그의 시각에 문제가 있고 그는 40여 점의 다른 화가 작품을 베르메르의 것으로 잘못 판단하기까지 했으나 학계와 대중에게 그의 영향력은 컸다. 이어지는 연구들로 베르메르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하나로 부상했다. 이때 시장에 나온 그의 그림을 미국의 사업가, 사교계 인사들이 고가에 사들여 오늘날 유럽 이외에 있는 국가로는 유일하게 미국의 보스턴, 뉴욕, 워싱턴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위조와 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네덜란드 화가 반 메헤렌(Han van Meegeren)의 위조 사건이다. 1932년부터 본격적으로 베르메르 위작을 그려온 그의 [엠마오의 저녁식사]를 학자들은 베르메르의 초기작으로 감정해 1937년 5십5만 길더에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미술관이 구입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중에 나치의 헤르만 괴링 거처에서 그가 그린 또다른 베르메르 작품이 발견되어, 유출 경로를 조사하던 경찰이 그를 검거했다. 네덜란드 국보급 회화를 적국에 넘긴 죄를 추궁받던 그는 전범보다는 위조범이 되기를 선택하고 자백했다. 그러나 이를 믿지 않았던 법정에서 그 그림을 그려 보이기까지 했다.

전후에 인기와 명성이 더욱 높아진 그의 작품은 정치범들에게 도난당해 ‘인질’로 쓰이고 그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이 파손을 당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1990년에 보스턴에서 도난당한 그의 작품 [합주]는 현재까지도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다.


관련링크 :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


김진희 / 미술평론가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 현재 갤러리 우리들의 눈 큐레이터.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NM), 지엔씨미디어


출처 :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art/theme/2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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